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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생명의 기원


자연 설계론은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프로그램하고 짜맞춰야 할 것들, 생명이 탄생할 수 있는 환경이 되기 위해 인위적으로 미세조정해야 하는 우주의 모든 것들은 자연적으로 설계되었다는 이론이다. 이는 곧 자연 자체가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자연은 무작위로 모든 경우의 수를 무책임하게 던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자연 설계론은 지적 설계설과는 구분된다. 창조론(창조설)을 포함한 지적 설계론은 생명이 지적 존재에 의해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자연 설계론은 우주가 미세설계한 환경에서 자연 스스로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자연발생설과도 구분되는 점은 의식-에너지-물질-생물로 발전되기 위해서는 우주의 미세조정이 필요하며, 수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또한 이신론, 범신론을 포괄하면서도 구분되는 점은 신이 아닌 ‘의식’의 존재이다. 이신론은 세계를 창조한 신이 존재하지만 그 신이 인간에게 개입하거나 기적을 내리는 인격적 주체자는 아니라고 말하며, 범신론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신이라고 말한다. 이들은 철학적 관점만이 존재하는 하나의 종교에 불과하지만 자연설계론은 인간 이외의 모든 것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며, 이는 뇌가 없는 세포의 지적 활동과, 무생물의 선택적 합성 활동을 근거로 들 수 있으며, 우주와 자연, 그리고 진화의 무작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함으로써 성립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명의 기원에 대한 현대의 가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뉜다. 오피란의 화학진화설과 지적설계설(창조론)이다.

화학진화설은 원시지구의 무기물이 화학적 결합으로 인해 유기물이 되었고, 이것이 원시생물로 진화했다는 가설이다. 밀러의 실험을 통해 무기물이 아미노산 등의 유기물로 합성되는 것이 확인되었으나, 단백질을 구성할 수 있는 아미노산은 절반도 채 생성되지 않았다. 또한 그 아미노산 조차 D형을 가진 아미노산이었기 때문에 L형 만을 필요로 하는 단백질을 구성할 수 없어 ‘죽은 유기물’임이 밝혀졌다. 현대의 과학 기술로도 정교한 환경에서 인위적인 화학합성을 하지 않고서는 생명에 필요한 단백질 조차 만들 수 없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외계 생명체 유입설이나 심해 열수구설 등을 주장하게 되었지만, 생물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는 DNA는 우연히 탄생할 수 없다는 과학적 반론들이 속속 제기됨에 따라 창조론은 더욱 힘을 받고 있다.

창조론은 지적 설계설을 기반으로 ‘지적 설계자’가 인위적으로 개입하여 천지를 창조하고 모든 종을 탄생시켰다는 원리이다. 주로 생명의 기원에 대한 다양한 가설과 진화론의 맹점을 토대로 가설의 당위성을 구축하며, 생명이 창조된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6,000년 밖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창조론은 수억 년 이상 보존된 화석을 설명할 방법이 없어 방사성 동위원소 연대 측정법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한 과학을 종교의 영역에 끌어들이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고대 비문명인의 시각에서 쓰여진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인 나머지 몇몇 심각한 오류를 과학적 근거 없이 ‘신’의 전지전능함으로 무마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안정적으로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이유는 오랜 빙하기가 끝나고 겨우 수만 년 동안 지속될 간빙기에 살고 있기 때문이고, 완벽한 위치에서 우주의 재해들을 막아주고 있는 태양계의 행성들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성이 생명체가 살 수 있는 환경이 될 확률은 매우 낮으며, 유기물이 우연히 단백질을 합성하여 RNA와 DNA를 갖고 생물로 진화할 확률은 극한의 0에 가까운 수치이다. 더 나아가면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우주상수가 조금이라도 작거나 컸다면 생명체는 물론 행성도 제대로 형성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의 우주가 은하를 만들고 행성을 형성할 수 있는 우주상수를 가질 확률은 얼마나 될까? 1/100의 500승 (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1%)이다. 여기에 위에 언급한 두 확률(0이거나 극한의 0에 가까운)을 다시 곱하면 ‘무’ 에서 생물체가 자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확률을 구할 수 있다.

생명의 탄생이 인위적으로 설계되었다고 믿지 않는 과학자들은 우주가 수천 조의 수천 조 배가 있어도 만들어질 수 없는 생명의 확률을 해결하기 위해 ‘인류원리’를 도입한다. 인류의 존재 자체가 설명할 수 없는 모든 물리현상들을 설명한다는 원리이다. ‘무’ 에서 무작위로 생명체가 탄생할 확률은 어느 순간 100%가 되어버리고 만다. 과학계의 거만한 종교 ‘나신교’가 탄생한 순간이다. 현대 과학의 가장 큰 실수는 우주의 무작위성을 당연시하며 지능은 오로지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권능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주의 먼지와도 같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능은 우주와 자연의 지능에 비할 수 없다.

다양한 유기물로 태초의 생명을 조립하는 과정은 자연의 무작위성에서 확률을 따지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우주는 지능을 가지고 있다. 아니, 모든 것은 지능을 가지고 있다. ‘무’는 ‘유’가 되기를 원하고, ‘유’는 에너지가 되기를 원하며, 에너지는 물질이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물질은 에너지와 함께 끊임없이 운동함으로써 생명이 되기를 본능적으로 갈망한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깨닫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진화하는 것이다. 우주의 그러한 욕구 대로 모든 것은 오랜 시간을 걸쳐 보다 나은 것으로 진화하였고, 최종적인 진화의 산물인 지적 생명체가 탄생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나는 존재한다.’ 라고 생각하는 생명체가 탄생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생명의 탄생을 위한 우주의 미세조정은 빅뱅 단계부터 시작되었다. 우주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극한의 0의 확률을 향해 마치 당구공을 치듯 빅뱅을 터뜨렸다. 그리하여 행성과 은하가 만들어질 수 있는 우주상수가 되었고, 생명에게 필요한 모든 물질들이 만들어졌다. 우리의 지구가 적절한 태양계에서 달과 함께 적절한 곳에 위치하게 된 것도 고도로 계산된 빅뱅의 미세조정인 것이다. 미세 조정을 마친 우주는 자연 스스로가 지적 활동을 통해 생명을 탄생시키고 스스로 진화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신이 우주의 유일한 지적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인간이 보면 모든 것은 우연처럼 보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확률 놀음을 하다 좌절하곤 한다.

화학적 진화이든, 인위적인 창조이든 간에 아무 것도 없던 곳에서 생명이 태어났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것이다. 진화론은 수십억년의 시간 동안의 우연성에서 그 가능성을 찾고자 하고, 지적 설계론은 ‘수십억년 동안 아무렇게 타자기를 두드려도 셰익스피어의 소설은 나올 수 없다’는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을 들어 신에게서 가능성을 찾는다.

그들은 자연이 일련의 선택지 내에서 스스로 보다 나은 선택을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는 자연의 자발적인 선택을 무작위와 우연성으로밖에 판단할 수 없는 인간의 무지에서 비롯된다.

최초의 원시생물체가 탄생한 이래 어떻게 지금의 인간이 있을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두 가지가 존재한다. 자연이 인위적으로 생명을 탄생시켜 최초의 생명이 분화를 거듭했을 경우와  지적 설계자가 개입하여 다양한 종의 생명을 탄생시키고 번성을 촉진시켰을 경우이다. 이는 진화론과 창조론의 이야기가 아니다. 바로 자연설계론의 이야기다.

우선 진화론과 창조론, 기존의 두 이론을 한 번 살펴보자.

진화론의 경우 화학진화설을 기반으로 탄생한 원시생물로부터 생명이 분화한다고 주장한다. 최초의 생명체들은 자가복제를 계속하다 생존에 유리한 돌연변이들이 자연 선택되어 번식을 거듭하게 된다. 그렇게 돌연변이를 통한 종과 종 간의 분화를 거듭한 끝에 지금의 인간이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주장의 근거를 유전자에서 찾는다. 인접한 종의 유전자는 상당히 유사하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로 인류와 가장 유사한 DNA를 가진 생물은 침팬지가 아니라 ‘쥐’ 임이 밝혀졌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의 맹점을 집중적으로 공격한다. 그 중의 하나는 캄브리아 시대의 ‘생명 대폭발’이 한 번에 다양한 종이 창조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이는 당시 화석 발굴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진화론자들의 큰 약점이었지만 현대에 와서는 해당 시대의 진화의 증거들을 90% 이상 발견한 상태이다. 종 자체가 바뀌려면 중간 과정의 종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껏 발견된 ‘잃어버린 고리’들은 수많은 종과 종 사이의 고리를 대변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나도 적고 개연성도 부족하다고 한다. 그러나 급격한 기후변화와 종의 대이동이 잦았던 고대에는 진화에 빨리 적응하지 못한 중간종들은 빠르게 멸종했을 것이다. 현대에는 종과 종 사이의 생태 영역과 먹이 사슬이 어느 정도 확립되어 급격한 진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한다. 유전자 자체가 지성을 가진 게 아니라면 돌연변이를 통한 자연선택 진화에도 분명한 한계는 존재한다. 진화론자들은 진화의 근간이 무작위성에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환원 불가능한 복잡성은 창조론자들의 가장 든든한 버팀목이다. 이에 반해 진화론은 최근에 와서 마치 양파를 까는 것과도 같이 그 허점이 수없이 드러나고 있다.

진화론과 창조론 모두 진화의 과정과 의문점을 충실히 규명해 온 것은 확실하다. 그 두 이론(가설)을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자연 설계론’이다. ‘자연 설계론’은 창조론과 진화론의 잃어버린 퍼즐에 해답을 제시한다.

생명체 자체의 지능은 극히 낮으나 자연으로부터 온 유기물은 무척이나 지능적이다. 유전자는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로 변종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생물의 일생 동안의 환경을 기억하고 생존과 번식 확률을 늘릴 수 있는 기능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다음 후손의 DNA 변이를 결정하게 된다. 짧은 수명의 생물들이 ‘환원 불가능한 복잡한 기관’을 세대에 걸쳐 진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작위적인 돌연변이로는 수백억년이 걸려도 부족하다. 가령 날개를 진화시키기 위해서는 유전자가 ‘날아야 할 필요성’과 ‘날기 위해 필요한 신체구조’를 수많은 세대에 걸쳐 지능적 활동으로 인지하고, 그 중간 진화단계의 날개가 생존에 방해되지 않게 부리와 같은 특정 기관을 함께 발달시키는 방법으로 세밀한 설계도를 만들어야만 한다. 손을 쓸 수 없으니 뾰족한 부리를 발달시키는 것은 유전자의 지능적 판단이지, 결코 우연한 돌연변이로 나타날 수 없다.

진화의 관점에서 지능이 없는 것은 유전자가 아니라 생물체이다. 생물체 자신이 아무리 날고 싶다고 생각해도 날개는 돋아나지 않는다. 진화의 판단은 유전자가 하는 것이지, 지능이 낮은 생물체가 할 권리는 없는 것이다. DNA 주위의 단백질이 DNA를 반으로 절단해서 나머지 반의 모형을 만들어 붙이는 것도 순전히 그 단백질들의 지능에 의한 활동이다. 자신을 복제하고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닌 DNA를 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 몸의 모든 세포들은 살아서 제각각의 의식적 활동을 수행하고 있다. 이것은 두뇌가 명령하는 것도 아니고 신이 명령하는 것도 아니다.

자연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무를 유로 만들 모든 지식을 쌓아왔다. 우리 인간의 뇌나 눈, 내장기관 등은 우리 인간이 수백년을 연구해도 똑같이 만들 수 없을 자연의 정성들인 발명품이다. 과학자들은 종종 인간으로서 지성을 가진 것에 대해 자신을 대견스러워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눈과 그의 뇌와 그의 모든 기관은 그의 선조가 임신하여 만든 것이 아니다. 바로 자연이, 우주가 수십억 년에 걸쳐 만든 것이다. 자연은 스스로의 발명품인 인간보다 결코 지능이 낮지 않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자연이 내준 숙제를 겨우 한 장 풀 수 있게 된 우주의 아기에 불과한 지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유기물은 생명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보다 크고 나은 것으로 선택적 진화를 한다. 기초적인 RNA가 형성되고 DNA가 형성되어 복제를 시작하게 된 것도 마찬가지다. 자연은 우주가 설계한 공식 대로 거기에 약간의 물리적 자극을 더해줬을 뿐이다. 인간이 그 일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생명이 우연히 탄생되었다거나, 신이 내려와 탄생시켰다고 하는 건 옳지 않다. 단지 인간의 과학기술이 자연의 과학기술을 따라잡지 못했을 뿐, 과학이 더욱 발달한 미래에는 인간도 자연의 방식으로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다.

만약 지구의 생명체가 자연 설계되지 않았다면 외계인이 우리의 선조일 가능성도 추론해볼 수 있다. 자연으로부터 창조된 우리의 선조들은 자신의 행성에서 언제까지나 살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고, 문명의 대를 이어가기 위해 다른 행성을 개척하고 생명의 씨앗을 뿌렸을 수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다양한 종교의 성서들에 공통된 점이 있다는 것이다. 일정 시대의 역사적인 큰 사건 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 기적을 행하며 인류를 이끄는 모습이 자주 보인다. 만약 그가 당대에서 활약한 어떤 영웅적 인물이었다면, 그를 왕으로 섬길지언정 ‘하늘에서 내려와 기적을 행하고 사라지는 신’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서가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며 과장되고 신격화될 여지는 충분히 있지만, 성서는 어느 한 작가가 한 세대 동안 써서 출판한 것이 아닌 수십 세대에 걸쳐 기록된 역사책이므로 단순히 허황된 소설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당시의 비문명인들은 UFO를 타고 온 외계인의 선진 기술이 신이 하늘에서 내려와 기적을 행한 것 처럼 보였을 것이다. 따라서 성서에 기록된 신화는 비문명인의 시선에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가령 노아의 방주가 등장하는 대홍수는 세계 곳곳의 성서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기록된 것처럼 노아의 방주에 모든 생물의 종을 태울 수는 없다. 하지만 발달된 문명의 기술이라면 다양한 종의 DNA를 싣는 것 만으로 모든 종을 충분히 태우고도 남을 것이다.

또한 대홍수 등의 자연재해가 신이 노해서 일으킨 일이라는 기록은 당대의 사람들이 자연현상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외계인은 하나의 새로운 문명이 오랜 시간 유지되기가 얼마나 힘든 지 알고 있었을 것으므로, 인간이 스스로 자멸하지 않게 바른 길로 이끌고 대멸종의 위기를 겪을 때마다 그들의 과학 기술로 도와주어야 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머나먼 미래에 원시상태의 외계생물체를 발견한다면 얼마나 반가울까? 우리는 새로운 문명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갖은 힘을 다해 그들의 생존을 도울 것이다. 우주는 우리의 집에 더 많은 생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그러나 만약 어떠한 생명체도 찾을 수 없었다면 우리는 무척이나 공허하고 외로울 것이다. 또한 그 누구도 없는 공허한 우주에 홀로 남아 멸종되기만을 기다리는 마지막 생명이라는 사실에 두려움을 느낄 것이다. 과학 기술이 충분히 발달하면 우리는 지적 문명을 지속시키기 위해 인접한 행성에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뿌릴 지도 모른다.  이것 또한 우주가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다. 우주는 우리에게 자연의 지식을 배우고 활용하기를 원한다. 인류가 새로운 생명의 신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지구의 과학 문명의 마지막 단계이자 우주 문명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생명체를 논하기 이전에 이 모든 것의 시초는 과연 어디로부터 왔을까? 과연 모든 것을 창조한 신이 존재할까?

빅뱅 이전의 시간은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상상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실로 위대한 정신적 에너지이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에 의해 의식이 미시세계에서 파동함수를 붕괴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비물질계가 물질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이고, 이는 곧 무에서 유가 창조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추론해볼 수 있다.

미시세계의 입자들은 인간이 관찰하기에 매우 불규칙적이고 불안정해 보이는데, 이건 우주의 입장에서 우리를 관찰하였을 때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 우주 만한 외계인이 우리를 본다면 우리는 하나 하나가 매일 무작위로 지구 위를 돌아다니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성을 가지고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우주 만한 외계인은 우리가 출근하기 위해 움직였다 회사 안으로 사라지고, 퇴근하고 술집에 가기 위해 움직였다 술집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단지 방향성을 가진 무작위적인 양자 운동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인간이 각자의 행동 반경에서 활동하며 각자의 직업을 갖듯, 전자는 원자의 성질을 결정하기 위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특이한 스핀 운동을 한다.

미시세계에서는 관측행위에 따라 그 입자의 상태가 확정되는데, 입자의 운동량과 위치는 거시적 관점에서 동시에 측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그러한 탓에 슈뢰딩거의 고양이를 들며 자연의 불확정성을 이야기하곤 하지만, 미시세계의 입자는 관측이나 측정 같은 어떠한 외부적인 요건이 가해져도 파동함수가 붕괴될 정도로 에너지에 민감하다는 의미일 뿐 그 결과가 무작위적인 것은 아니다. 현재까지도 미시세계에서 입자의 무작위성을 결정짓는 비국소적 숨은 변수를 찾기 위한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우리가 시공간의 밀도, 중력에 영향을 받듯 미시세계의 입자들도 제각각의 공간에서 밀도를 가지고 시공간을 왜곡시킨다. 현대 과학으로 이론적인 입자의 시공간 밀도를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에 거시세계의 시점에서 본 양자이론은 무작위적 확률론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현대과학의 한계를 딛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물리적 현상을 ‘우연’이나 ‘무작위’로 치부해왔던 관습을 버려야 한다.

모든 물질은 가장 작은 입자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의식’과 미시세계의 입자들 사이의 상호 영향성은 클 수 밖에 없다.

태초에 아무 것도 없던 무의 세상에서는 비물질계(의식)가 바로 그 ‘무’ 자체였을 것이다. 물질계에 살고 있는 인간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개념이 바로 ‘무에서 의식이 태어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일 것이다. 이것은 철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무’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쉽게 말해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존재하지만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다. ‘비물질’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물질을 매개로 하지 않는 유일한 비물질은 ‘의식’이다. 무는 곧 비물질이며, 비물질은 곧 의식이다.

고로 무는 처음부터 ‘무’로써 존재했으며, 의식도 처음부터 ‘의식’으로써 존재하였다. 생명체만이 ‘의식’을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한낱 생물의 시각에서 보는 편협한 자만일 뿐이다. 모든 물질은 비물질에 속해있으므로, 모든 물질은 의식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생물의 의식 활동의 결과물 만을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비물질의 거대한, 수많은 의식이 자연의 물리공식을 설계하고 정립하고 제어하고 있다면 어떨까? 영화 ‘아바타’에서 나무들이 유기적으로 이어져 하나의 거대한 지성을 갖춘 것 처럼, 이 세상은 비물질의 거대한 뇌로 이루어져 있을 지도 모른다. 이는 곧 비물질의 의지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비물질이 차원이라는 개념을 생각한다면 그 자체로 차원이 만들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무’ 는 비물질의 의식이 생각하고 있는 상상의 공간 그 자체인 것이다. 의식은 자연의 물리법칙을 생각하고, 시공간을 상상하였으며, 필연적으로 물질의 상상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가 물질로부터 영감을 받고 그것을 상상하듯, 비물질에게 있어 물질은 자신의 의지를 물질적으로 상상한 결과물이다. 그리하여 의식으로부터 탄생한 무한한 에너지들은 물질로 변환될 수 있다는 물리학법칙을 부여받게 된다. 비물질은 우리가 인지할 수 있는 ‘물질’ 외에도 우리가 상상할 수 조차 없는 수많은 것들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러한 창조 과정으로 인해 의식은 무한한 지능을 가지게 되고 무한한 기억과 경험으로 자연계의 시스템을 미세조정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이 태초의 시작은 아니라는 점이다. ‘무’의 의식 상태는 누군가가 창조하거나 스스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시작도 끝도 없이 무한히 펼쳐져 있는 것이다. 즉, 의식에 의해 에너지가 만들어지나 의식이 원래 존재하였으므로 에너지도 원래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태초’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려면 ‘무한’의 개념을 이해하여야 한다.

쉽게 이야기해서 하나의 가정을 해보자. 우주의 시간이 100억년이 흐르면 하나의 입자가 탄생한다는 가정이다. 현재의 우주는 입자가 수없이 많다. 그렇다면 아무 것도 없던 우주에서 최초의 입자가 탄생했던 때는 언제일까? 답은 ‘아무 것도 없던 우주는 없었다‘ 이다. 가령 입자가 처음으로 만들어지기 200억년 이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 상태’가 존재하지 않았는가? 아니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는 입자가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존재해왔으며, 이는 그 입자가 만들어지기 훨씬 이전부터 입자를 만들어왔다는 뜻이다. ‘무’ 는 그 자체로 없는 것이지 ‘무’ 라는 상태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우주는 원래부터 입자가 무한히 많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우주에서의 무한이라는 개념은 1부터 시작해서 무한대의 숫자로 커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 숫자부터 시작할 지, 어느 숫자로 끝날 지를 알 수 없는 것이 바로 무한이다.

우리 우주의 저편에는 새끼 우주를 낳는 무한한 차원의 모우주가 있을 것이다. 모우주의 물질과 에너지가 극한의 어떠한 상태에 다다라 특이점(부피가 0이고 밀도가 무한대인 점)을 형성하면 폭발성 에너지를 새로운 차원에 방출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빅뱅이다. 빅뱅의 증거가 명확한 우리 우주는 태초의 모우주는 아니지만 모우주의 무한한 차원 중 하나로써 모우주에 속하고 있다.

4차원의 물질계에 사는 우리는 우리가 보는 우주가 세상의 전부라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 중력, 전자기력, 강력, 약력, 질량과 속도, 시공간과 빛, 원소들의 결합법칙.. 우리 세상의 모든 물리학 법칙들은 신기하리만치 정확하고 확실성을 띄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자연이 내던진 주사위 덕에 무작위로 이루어지게 된 것일까? 이 세상에 무작위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당위성을 띄고 있다. 인간은 자연의 법칙에 어긋나는 무작위를 구현하기 위해 랜덤 함수를 사용한다. 랜덤 함수는 인간이 정해놓은 일정 범위의 정수를 수차례 섞어 난수를 만든 뒤 시간차를 두어 출력함으로써 구현된다. 무작위는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가상의 수놀음일 뿐이며, 이는 복잡하고 정교한 자연현상을 단순화하여 모방할 수 있을 뿐 결코 자연을 해석하는 용도로는 쓸 수 없다.

‘우주의 모든 것은 우연히 무작위로 발생된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종교인가? 그들의 주장은 유신론자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과학자들은 현재 이 우주의 모든 행성들이 왜 이동하고 자전하며 끌어들이고 밀어내는 지 이미 알고 있다. 중력이 미치는 거리는 무한하기 때문에 하나의 행성은 우주의 모든 행성에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 행성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우연과 무작위로 치부해버리고 확률 놀음만 하고 있는 것이다. 생물이 아닌 아미노산 펩티드 조차도 단백질을 형성하기 위해 동일한 종류의 아미노산과 선택적 결합을 하지, 결코 아무렇게나 합성해서 ‘실패할 확률’을 만들지는 않는다.

현대의 과학자들이 ‘무작위’에 대한 환상을 버릴 수 있다면, 그 시점을 기해 인간의 과학 기술은 급격한 속도로 성장할 것이다.

현대 과학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기존 이론에만 묶여 도태되어선 안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눈에 보이는 자연 현상을 규명할 뿐 그 근원은 탐구하려 하지 않는다. 현재의 기술로 납득할 수 없는, 혹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파헤치고자 하면 그에 따른 수많은 비판의 눈초리를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전부터 그래왔듯 진실을 탐구하는 선구자를 철학자나 망상론자로 취급하여 과학으로부터 배척시킴으로써 자신들의 명성을 유지한다. 그들은 자연의 물리법칙을 아주 일부분 알게 되었을 뿐인데, 자신들이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선구자인 양 자만하고, 부정한다.

이는 눈에 보이는 것만 믿던 옛날 사람들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주장한 갈릴레이를 사장한 것과 뭐가 다른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우주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는 자만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인지함으로써 도태와 자멸을 막을 수 있다. 의식 활동을 통해 무언가를 끊임없이 창조하고 발견하며 번성함으써 무한한 우주를 닮아가는 것, 그것이 생명에게 주어진 존재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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